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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안대군 (138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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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의안대군(1382년)은 조선 태조 이성계와 신덕왕후 강씨의 차남으로, 1392년 왕세자에 책봉되었으나 제1차 왕자의 난으로 폐위된 후 살해되었다. 그는 신덕왕후의 총애를 받았으며, 형들을 제치고 세자가 되었으나, 이는 이복 형인 태종 이방원과의 갈등을 초래했다. 세자 시절 부인의 간통 사건으로 인해 부인이 폐출되기도 했다. 1398년, 이방원의 난으로 인해 세자 자리에서 폐위되고 살해되었으며, 사후 숙종 때 의안대군으로 추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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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안대군 (1382년)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이방석
한글이방석
한자李芳碩
히라가나り ほうせき
가타카나イ・バンソク
왕족 정보
작위조선 태조의 왕자
작위2조선의 왕세자
재위21392년 8월 20일 ~ 1398년 8월 26일 (음력)
후임자2왕세자 방과 (정종)
출생일1382년
출생지고려 개경
사망일1398년 8월 26일 (음력)
사망지조선 한성부
이방석(李芳碩)
시호소도(昭悼)
배우자폐세자빈 유씨, 현빈 심씨
자녀1남 (조졸)
아버지태조
어머니신덕왕후 강씨
능묘의안대군 방석 묘
별칭소도군(昭悼君)

2. 생애

1382년 조선 초대 국왕 태조 이성계와 그의 두 번째 부인 신덕왕후 강씨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태조는 신덕왕후를 총애했고, 의안대군은 어릴 적부터 온화하고 총명하여 더욱 귀여움을 받았다.

1392년 조선 건국 후, 9월 7일(음력 8월 20일)에 왕세자로 책봉되었다. 7명의 형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세자에 책봉된 것은 신덕왕후의 의향이 크게 작용한 결과였다. 이는 건국에 공헌한 이복 형 정안대군 (이성계의 다섯째 아들. 후의 태종)에게 미움을 받는 원인이 되었다.

1393년 정실 부인 유씨가 내시 이만과 밀통한 사실이 발각되어 이만은 처형되고 유씨는 폐세자빈이 되었다. 1394년 두 번째 정실 부인으로 심씨를 맞이했다.

1396년 9월 15일(음력 8월 13일) 어머니 신덕왕후가 사망했다. 신덕왕후는 마지막 순간까지 아들의 앞날을 걱정했다고 한다.

1398년 10월 6일(음력 8월 26일) 제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났다. 정안대군은 자신의 측근들과 신의왕후 한씨 소생 왕자들을 제거하려는 계획이 있다고 의심하여 형제들과 함께 거병하였다. 정도전과 장인 심효생은 태조가 병이 났으니 문병하라고 왕자들을 불렀고, 이때를 틈타 의안대군은 세자 자리에서 폐위되고 살해되었다. (동복 형인 무안대군과 의형인 이제도 함께 살해되었다.) 그의 나이 16세였다.

이 사건으로 태조는 태종에게 깊은 증오심을 품었고, 수년간 부자 관계가 악화되었다고 한다.

2. 1. 어린 시절

1382년 조선 초대 국왕 이성계와 그의 두 번째 부인 신덕왕후 강씨 사이에서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 이성계는 신덕왕후를 총애하였고, 이방석은 온화하고 총명한 성품으로 더욱 귀여움을 받았다.[1] 고려 말에는 경처와 향처 두 부인이 있었고 모두 정실 부인이었다.[1]

2. 2. 세자 책봉

태조 1년 9월 7일(음력 8월 20일) 세자로 책봉되었다. 그는 형 무안대군 방번과 이복 형들을 제치고 선택되었는데, 이는 신덕왕후의 의향이 크게 작용한 결과였다. 적장자 계승을 중시하던 당시 관념으로는 이례적인 일이었다. 훗날 태종 이방원 등은 정도전 등이 그를 세자로 선택했다고 적극 주장하였지만, 아직까지 정도전이 이방석을 세자로 선택했다는 명확한 근거는 없다.

세자 시절, 부인 현빈 류씨(賢嬪 柳氏)와 내시 이만(李萬)의 간통 사건이 발생하여 류씨는 폐출되고 이만은 처벌받았다.[1] 세자는 현빈 심씨(賢嬪 沈氏)를 새 부인으로 맞이하였다.[2]

2. 3. 제1차 왕자의 난과 죽음

태조 7년 (10월 6일), 정안대군 이방원이 주도하여 제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났다. 세자 이방석은 광화문 앞에 주둔하고 있던 정안군의 세력에 대항하기 위해 직접 군사를 이끌었으나, "광화문으로부터 남산에 이르기까지 정예 기병이 꽉 찼다"는 봉원량의 보고[3]에 군사 대응을 포기하였다.

정도전, 남은, 심효생, 박위 등 정안대군 측에서 부정적으로 보았던 세력이 제거된 후, 정안대군 세력은 세자를 이방석에서 영안대군 이방과(훗날의 정종)로 교체했다. 유배되기로 한 폐세자 이방석은 잠시 후 영추문을 통해 경복궁에서 나왔고, 이거이 등 정안군 세력은 도평의사사와 합의하여 자객을 보내 이방석을 죽였다.

3. 사후

태종1406년 9월 14일(음력 8월 3일) 이방석을 소도군(昭悼君)으로 추봉하였다. 1680년 8월 21일(음력 7월 27일) 숙종은 이방석을 의안대군(宜安大君)으로 추봉하였다.

3. 1. 추봉과 묘소

사후 시신은 경기도 광주에 안장되고 오원공(五原公)에 추봉되었다.[1] 1406년 9월 14일(음력 8월 3일), 태종은 이방석에게 소도군(昭悼君, 또는 소도공)의 시호를 추시했다.[1] 1680년 8월 21일(음력 7월 27일), 숙종은 신원정치의 일환으로 이방석을 '''의안대군'''(宜安大君)으로 추증하였다.[1]

이방석의 묘소는 경기도 광주시 남한산성면 엄미리 '의안대군방석묘역' 내에 있다.[1] 1998년 4월 13일 경기도기념물 제166호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다.[1]

4. 가족 관계

관계이름출생 - 사망비고
아버지태조1335년 - 1408년조선의 제1대 왕
어머니신덕왕후1356년 - 1396년
누나경순공주? - 1407년
무안대군1381년 - 1398년
부인봉사손|


5. 대중문화 속의 의안대군

참조

[1] 서적 조선왕조실록 태조실록 3권 1393-06-19
[2] 서적 조선왕조실록 태조실록 12권 1397-09-27
[3] 서적 조선왕조실록 태조실록 14권 1398-0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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